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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 본문
주워온 통나무들 말고도 구부린 합판, 벽돌, 수건, 현수막과 같은 물건들을 하얗게 칠하였다. 나무들은 각각 <여러 갈래로 눌려있는 작은 나무> , <알전구의 열기로 인해 터진 나무> 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꼬여 있는 합판은 < 어제의 나 > 와 같은 이름들을 붙여줄까 생각중이다.
이런 식으로 표면처리하는 방식에 매력을 느낀것은 아마도 소영씨 글때문이 아닌가 싶다. 학부시절 같은 수업을 들었던 서양화과 후배분인 소영씨는 유독 좋은 글들을 보여주었다. 글을 읽다보니 소영씨 작업들이 강하게 기억될정도로 말이다. 이후 남들은 밑천을 드러내는 SNS에서도 종종 소영씨는 긴 글을 써올렸었는데 대부분 끝까지 읽고 또 몇몇은 스크랩해둘만큼 문장들이 좋았다. 그중, 사포질하는 모습을 이어만든 영상에서 나레이션으로 나왔던 '...사물마다 강도가 달라서 같은 사포로 문질러도 어떤것은 윤이나고 어떤것은 이렇게 망가져버린다. 아마도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모두가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것으로 여기는 고통들도 누군가에게는 견딜수 없는 강도의 것일수도 있다.' 이런 비슷한..(사실 내용만 기억나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구절이 있었는데 그게 무척 와닿았다. 당시 나는 여러모로 성취감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것 같다. 사회가 있고 체계가 있는 이상 그것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고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편하게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도태되기 마련인데, 이것의 당위성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종점이며 앞으로는 대의를 위한 고분군투보다는 소비자를 관리하고 더 완벽한 서비스의 구현을 위해 사람들은 치열해질 것이며 창조적인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대체될 가능성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평가가 널리 수용되어있고, 도태되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과 질시가 심지어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는 일도 허다하다. 이를테면 노력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에 대한 질타가 그러하고 남들 다 견디는 시험과 평가를 유독 괴로워하는 사람에 대한 눈초리가 그러하며 돈을 벌려는 노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멸시가 그러하다. 이것은, 경쟁과 자본을 다른 인간적인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분위기같다. 위와 같은 사람들을 일종의 '책임감 없는'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로 보는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정말 근본적으로 존중되어야한다면 저러한 결정들을 질타해서는 안될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근본적으로 존중되어야하는건가? 하는 질문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본주의는 인간까지도 대체품으로 몰아가는 소외를 일으키는 이념이라 보아야 할수도 있겠다. 이지경이 된다면 다시 질문해야 할것 같다. '열심히' 라는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옹호되는 가치가 '옳은'것인가?
아무튼 이러한 질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소영씨 작업을 본 이후, 사회 분위기와 유행어들 속에 숨어있는 모순점들을 정확히 알아나가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싶었다. '모호한 유토피아' 라는 주제로 요즘 작업들을 정리해나가고 있다. 내가 보는 사회, 모순된다고 느끼는 현상들, 이미 만들어져있는 '옳다' 거나 '악하다'는 판단의 프레임, 그로 인해 쉽게 시도되는 몇몇 단어의 조합으로 인한 선동, 언어의 오염, 선악의 희미한 경계,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대안구조 등등. 그중에 각자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그것이 인과관계가 되어 모양을 가지고 있는 여러 대상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며 비슷하게 보이는 표면을 가진 오브제들로 풍경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비슷한 표면을 통해 각각 물체들은 '동일한 기준' 으로 판단되기도 하지만 내심 들여다보면 각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 어울리는 듯, 억지로 어울리게 해놓은 듯한 풍경을 통해 '내가 보는 세상'을 구성하였다.
'모호한 유토피아' 는, 현재상황, 내 주변을 바라보며 어떤 판단도 내리기 어려운 상태를 반영한다. 이를테면 노동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시위하는 현장으로 내몰리는 것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면 그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지지하고자 사태를 지켜보다보면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어지는 순간과, 경찰의 부패로 인해 덮여진것처럼 보였던 사건의 피해자가 순결하지 않을 때 어떤 부분에서 정의를 찾고 추구해야하는지 모호해지는 지점이 그러하다. 부조리한 현실에 공분하고 비판할 여력은 있지만 막상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현실적인 벽앞에 무너지고 말기에 비현실적인, 마구잡이로 문제상황을 제거해낸 아주 불안정하고 불균형한 유토피아를 창출해낸다.
내가 보는 사회의 모습이 과연 또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할 지경으로 문제가 많은 상황인것인가? 문제상황을 마구잡이로 들어낸 어떤 세계를 유토피아라 상정하고 만들어보니 이또한 비현실적이고 아주 불균형하기 짝이없다. 어쩌면 내가 말하고 있는 다양성, 개개인의 발언들, 부조리와 부조리를 폭로하는 현장이 공존하여 혼란스러운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유토피아에 가까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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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보편적이고 소통 수단이며 동시에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내포하는 모순된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 또한 같은 것을 보여줄 수있다는 믿음이 객관성을 지니게 하지만 보는 방식에 따라 이념과 이데올리기를 내포하는 모순된 지점이 있다. 깜빡이는 표면은 균질한 픽셀로 보이지만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는 풍경 속에 뚜렷한 발언과 이념이 담기는 것 또한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내포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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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물성을 은유적으로 차용하고 극대화 시키며 내가 보는 풍경을 구성하고자 한다.
모두 '나무' 이지만 제각각의 시간을 가지고, 다른 모양으로 자라나고 다른 공정을 거친다. 주워온 나무, 휘어진 합판나무, 휘지 않도록 잘라 붙여진 나무들은 다른 모양과 다른 종류로 분류되는 것에 비해 '나무'이기 때문에 동일한 느낌을 가진다. 이게 내가 보는 사회와 유사하다.
주제와 경화제가 나뉘어 있어 정확한 배율로 섞이기 전까진 유동적으로 계속 흐르던 에폭시가 의도를 가지고 배합하면 순간을 포착하며 경화한다. 이게 내가 느끼는 '모호한 유토피아'의 형태와 유사하다.
깜빡이는 표면은 균질한 픽셀로 보이지만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는 풍경 속에 뚜렷한 발언과 이념이 담겨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본질과 유사하다.
아
이게 그래서 먼소리일까
머릿속은 정리되기 전엔 왜 이렇게 개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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