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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_7 본문
사영인
2015
작업을 위해 준비해둔 재료들을 꾸준히 살펴보다 각각이 지닌 물성이 드러날 때 강하게 매료된다. 대체로 굳지 않고 흐르며 형상이 변해가는 실리콘, 에폭시와 같은 재료를 꾸준히 관찰하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형상과 원리는 종종 당시 뇌리에 박혀 있던 생각이나 고민 중인 문제와 연결되어 일종의 은유로 내게 다가온다.
작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형상이 중요하냐, 그 속에 담긴 내용과 주제의식이 중요하냐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다. 그만큼 재료와 물질들이 보여주는 형상과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작업의 과정이 된다. 실리콘을 얇게 펴놓고 그 위에 기름을 조금씩 떨어뜨리면 시간이 흐르며 기름 안쪽의 실리콘은 여러 모양으로 뭉쳐져서 군집을 이루게 된다. 느리게 흘러가며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 믿기 때문에 빠른 변화나 단호하게 못박는 체제를 보면 저게 얼마나 가려나 싶다. 이런 생각이 실리콘과 기름을 보며 다시금 머리 속에 떠오른다. 기름이 실리콘을 뭉쳐서 추상적인 모양을 만들어 내듯, 사회에 체계가 있고 우리들이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힘에 의해 조직된 모양새 아닐까.
물질들이 드러내는 물성과 현상은 나의 개입이 무척 적기 때문에 우연한 모양을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형상을 보여준다. 통제를 벗어나 나름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규칙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그 규칙을 찾고자 한다. 각각의 재료와 물질끼리 반응하는 규칙을 내가 가진 문제 의식에 대한 은유로 바라보고, 흐르는 속성, 밀도에 따라 생기는 형태와 같은 것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역사 시리즈의 작업을 할 당시에는 역사에 대한 일종의 좌절감이 작업의 시작점이었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꾸준하게 현재 삶에 영향을 주는 전쟁으로 인한 분단상황, 동생의 군대문제, 정치문제와 같은 일들은 내가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과 태도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을 이해하기 위해 글과 이미지, 영상자료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당대의 온도는 제거한 채 차갑게 박제된 일련의 사건들을 안전하게 편집된 상태로 마주하게 되었고 이것은 내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으로 이어졌다. 마치 끓어오르는 순간을 담고 있지만 유리 수조 속에 차갑게 담겨있는 에폭시처럼.
물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재료에 대한 흥미가, 작가로 살아가며 세상을 소화하는 방식과 연결되고, 작업으로 이어진다. 문제의식과 세상의 구성원리를 물질에 비유하는 방식을 통해 내가 바라보는 삶의 단상을 포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