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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SUP 2014. 8. 16. 01:47

사유란 주인이 임의로 멈추게 할 수는 없는 노예다.(계몽의 변증법 72P) 


역사 이래로 사유행위를 지속하며 논리와 합리성의 토대 위에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온 동력이 된 사유와 반성은 '물화'의 단계를 밟아갔으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따라서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단한 사회화와 관계 속에서 다듬어지는 나를 조우하는 일이다. 살아가듯,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하는 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다듬어 생각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묘하게 다듬어져가는 와중에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특별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꿈을 계속해서 꾸다보면 어떠한 종류건, 자극을 찾게 되었다. 덮어두고 잊었거나 보지 못했던, 가까운 도처의 현상들이 지닌 부조리와 환상을 들춰내는 사유행위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거나 동시에 특별한 시각을 갖고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여기며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일은 개인이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통탄하는 것을 아무래도 멈출 수 없을 것이란 것, 그리고 그러한 전복과 폭로와 해체가 반복되는 것이 삶이고 역사라고 여기기 시작하면서 가능한 것 같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마주하는 대상에 감정이입을 하며 계속해서 공감해보는 것, 겪어보지 않은 상황들에 대한 상상을 통해 잊고 지나가며 기만하는 부조리와 모순들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멈출 수 없는 사유행위가 향한 방향이며, 내가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기 위한 반성이다. 경험과 본 것을 넘어 상상의 영역에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에서 동력을 얻고 현실과 스스로에게 기만당하지 않고자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작업은 언어이다. 내겐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소통의 대상은 주변 지인들부터 살아가고 있는 터전인 세상을 포함하며 아우른다. 이 소통은 말을 걸고 대답을 듣고, 다시 말을 거는 적극적이고 빠른 방식이 아니다. 은밀하게 외치는 이야기에 누군가 감각으로 움찔하듯 반응하기를 바라는 소통이다. 때문에 나의 작업은 나의 관심사를 반영하여 작업이란 언어로 이야기한다. 작품 내용에 미술에 관한, 작업을 해나가는 개인의 이야기가 담기진 않는다. 삶의 활동반경이 미술 영역에 포개져있어 미술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일단은 보통의 삶의 속도, 방향, 인터넷, 뉴스, 잡담과 같은 도처의 이야기에서 영향받은 내용이 주제가 된다.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있는 곳곳에서 틀어주는 뉴스와 포털의 기사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나와 그리 멀지않은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내가 이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하는 주제들은 효율성, 합리성, 평등, 이성, 체계와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땅에 발딛고 살아가며 동시에 부여받은 여러가지 사회적인 지위들은 내 안에서도 여러 모순적인 충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통제와 조절없이 살아가는 것이 과연 행복에 가까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 체제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합리적인 선택들이 되려 개인의 삶을 발현하는 것에 전적으로 합당한지 의문이 든다. 히지만 동시에 무정부 상태나 사회가 아닌 야생의 상태에서 삶이 만족스러울지 또한 의문이다. 어디나 중용의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면 나는 합리성을 의심없이 추구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사회 속에서 경험한 합리성은 그것이 균형을 위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충동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해, 관습이나 규정으로 여겨지는 각종 체계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기위해 지속적으로 은유적인 시도를 던지게한다. 혹은, 문제의식을 지녔지만 그것을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전에 인간적인 면모에 먼저 동조하고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문제없는 밝고 환한 상태에서 좌절과 실패를 마주하지 않는 안정적인 시간을 추구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나 또한 그런 삶을 살아야하며, 어쩌면 이미 특정 종류의 실패와 좌절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으며, 누군가의 실패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짓궂은 장난처럼 삶의 모순을 들춰내는 것은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도려내기 위함이 아니고, 삶의 저울질에 속수무책인 우리들이 밀어낼 수 없는 절망과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모습을 또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고통과 견딜 수 없는 부조리 앞에서 뭉개지는 타자를 감싸안을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타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을 정신적 기재는 어떠한 관계와 신념에서 나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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