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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애_익명풍경_임근준비평글 본문
김민애 개인전 <익명풍경> - 세상과 나의 접면을 기리는 (비)기념비
임근준 _ 미술·디자인 평론가
신인 작가 김민애는 그간 이러저러한 기획전에 자아 탐구적인 작업을 선보였는데, 다소 감상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허나 이제 그는, 감정을 절제한 채, 작업 주체, 즉 ‘작품을 제작하는 자신’을 객체로 삼는 법을 터득한 모습이다.
첫 개인전 <익명풍경(匿名風景)>에서 조각가는, 일상의 소재로 제작한 기형(奇形)의 오브제로 알쏭달쏭한 풍경을 연출했다. 작품들은 작가의 사소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로 삼은 기억들은 모두 ‘대상을 관조(觀照)하고, 관조한 바를 조형물로 전환하는 일’에 연관된다. 예를 들어 보자.
전시장 바닥에 창문(窓門)이 있다. 유리가 차지할 자리를 시멘트로 메워놓은 쓸모없는 창호(窓戶)다. 이 갑갑한 창은 살짝 열려있지만, 바닥에 놓였으니 바닥이 보일뿐인데, 창유(窓牖) 아래로 조명이 장치돼 빛이 새나온다. 자세히 보면, 창틀의 오른쪽을 살짝 들어 올렸고, 그리 전깃줄이 기어들어간다. 그런데 야릇한 점은, 유리를 대체한 시멘트의 평면이 창틀과 달리 (전시장 바닥에 동조하듯) 수평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이 조형물의 제목은 <72×11>이다. 창문의 열린 폭이 11cm이고, 창틀 안쪽의 높이가 72cm이니, 개방된 공간을 지칭한다. 대체 뭐하자는 게임일까.
100kg이 넘는 이 육중한 조각은, 전에 살던 집의 창문--이웃집 벽에 가로막혀 사실상 쓸모가 없던--에서 남상(濫觴)했다. 그 창에 밤이면 가로등의 불빛이 살짝 스몄다는데, 작가는 이를 심리적 풍경으로 삼고, 그 변형된 기억을 물질화했다. 따라서 실재(實在)하는 창문에 연원하지만, 실재를 옮긴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의 조각’은 아니다. 작업의 결과는, 의미부여의 연상 과정을 통해 조작된 기억을 기리는, 기념비(記念碑, monument) 같지 않은 기념비다. 쉽게 풀어 말하면, 이 비(非)기념비(unmunument)는, 감정을 절제한 논리적인 작업 과정을 통해, 소통불능에 대한 불안감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소통불능에 대한 갈망과 공존한다.
작가가 개인전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하는 <원고지 드로잉(a, b)>은,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연필로 검게 칠해 메운 원고지를 그림으로 제시한다. 작가는 작업의 기초로 삼은 자신의 글, 남의 글, 그리고 남의 글을 요약한 글을 다시 읽으면서 빈 원고지를 하나하나 메워나갔다. 따라서 이는 지워진 원고가 아니라, 원고의 존재를 지시하는 등가물(等價物)로서의 모노크롬 회화다. (반면 <원고지 드로잉(c)>은 백색의 골판지로, 앞서 제작한 원고지 드로잉을 옆에 두고 검은 칸에 해당하는 공간을 오려낸 모양이다.) 문제의식의 직접적 노출을 금기(禁忌)시하는 일이 작업의 시작이라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한편, <지속된 반사>와 <모래성>은 난감한 ‘오인(誤認)의 기억’에 관한 작업이다. <지속된 반사>는 전시장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셔터 문과 그 아래로 장치된 거울의 설치물이다. 이는, “작업실 인근의 ‘늘 셔터를 내려 문을 잠근 공장’이 나중에 알고 보니, 가로줄의 요철이 있는 벽에 불과했다”는 황당한 경험에 기초해, ‘기억 속의 공장’을 물화한 결과다. <모래성>은 줄에 매달린 손전등이 모래더미에 꽂힌 화살표의 교통 표지판에 빛을 비추는 설치작(設置作)이다. 그런데 이 원형 교통 표지판의 지름은 37cm로 진짜 표지판보다 작다. (국내에서 통용되는 원형 표지판의 기본 크기는, 작으면 지름이 50cm, 크면 지름이 90cm라고 한다.) 작가는 작업의 전개를 “손전등에 의지해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일”로 상정하고,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되는 허술한 원칙 몇 가지를 “모래더미에 꽂힌 화살표의 교통 표지판”에 비유했다. 그런데 실재의 표지판을 마주해보니 인지(認知)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크더라는 것. 그래서 오인(誤認)된 크기에 맞추기 위해 공장에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매달린 손전등이나 모래더미는, 작가의 제한적인 형체인지/재인(形體認知/再認, embodied cognition/recognition) 능력을 지시하는 2중의 기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반면, ‘작업실 창문 너머로 뵈는 어느 집’에 연루(連累)된 작업인 <풀이 사는 집>은 자의(恣意)적 해석(解釋)의 딜레마를 표상(表象)하는 작업이다. 작가 메모엔 이렇게 적혀있다: “벽이 유난히도 하얘서 꼭 종잇장 같은 그 단층 집 바로 뒤에는 산이 있는데, 항상 해를 등지고 있어서 그 산은 어두컴컴하고 그 무대배경그림 같은 집의 흰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밤에는 창문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긴 사는 듯하지만, 나는 그 집을 ‘풀이 사는 집’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자의적 해석을 다시 객관화하기로 마음먹은 작가는, 화분 노릇을 할 골판지 상자를 제작하고, 그 상자의 상단에 집을 조각했다. (비고: 전작들로 미뤄볼 때, 작가에겐 골판지 페티시[fetish]가 있다.) 그리고 정원용 외바퀴 수레에 밑이 터진 상자를 놓고 원예용 흙 “쑥쑥이”를 들이부었다. 그리고 그 흙에 “천사의 눈물”이란 닭살 돋는 이름의 (자생력이 강한) 식물을 사다 심었다. “식물이 살기 위해선 종이 화분이 죽어야 하고, 종이 화분이 살려면 식물이 죽어야 하는 상황”이다. 고로 이 우화(寓話)적 (비)기념비는, 양립할 수 없는 자의성(恣意性, Arbitrariness)과 객관성(客觀性, objectivity)의 조화에 대한 알레고리인 셈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되는 작품은 <좁은 문>이다. 가장 기념비적인 이 (비)기념비의 제목은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의 동명 소설에 연원하는 듯하다. <좁은 문>은, 좁아서 발을 딛을 수 없는 어설픈 계단 위에 경첩으로 연결된 문짝 네 개를 얹어 놓고, 그 안에 조명장치를 설치해 목조 구조의 전시장 천정에 빛을 쏘아 올리는 탑이다. 서로 연결된 좁은 틈의 문들은 상충하는 기억들에 대한 다이어그램(diagram)으로 독해되는데, 이를 오를 수 없는 계단에 올려놨으니, <좁은 문>은 ‘제한된 인식 능력으로 세상과 나의 접면(接面, interface)을 물화(物化, reification)하는 조각을 만드는 일’에 대한 자기 선언적이고 자조(自嘲)적인 (비)기념비가 된다.
그런데, (비)기념비적 결과를 도출(導出)하는 이러한 방식은, 앞선 세대의 예술가인 박이소(1957-2004)와 정서영(1964-)을 연상시킨다. 박이소는, 하찮은 재료로 (비)기념비를 만듦으로써, 위대함을 추구하는 기념비적 존재들을 비웃었다. 반면 정서영은, 비미술적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박이소와 유사하지만, 사회비평을 시도하기 보다는 관념을 재현하거나 지시하는 방법에 천착해, ‘대상 없는 사물화(subject-less/object-less reification)’를 탐구해왔다.
지난 5-6년 동안 한국현대미술계에, 박이소와 정서영의 뒤를 따르는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기할만한 현상이었지만, 외형적 스타일의 모방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전대(前代)의 문제를 방법론의 차원에서 계승·변주하는 듯 뵈는 이 변종 신인의 등장은 반갑다. 그런데 김민애는, 박이소를 특징짓던 좌절의 정서나, 정서영을 지배하는 독기어린 공허함은 결여하고 있다. 그의 작업엔 긍정의 기운이 감돈다, 아직은. <바람낚시>가 좋은 예다.
3m60cm 길이의 각목 낚싯대는, 모눈종이로 만든 바람개비를 창밖에 드리운다. 작가는 손수 대패질을 해서 각목의 한쪽 끝을 팔랑개비용 수수깡의 비례로 전환시켰다. 미풍에 날개가 회전하면, 갤러리 밖의 세상에서 부질없는 희망을 낚는 느낌이다. 몹시 자폐(自閉)적이지만 불쾌하지 않게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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