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박정근씨에 관하여 본문

자료용

박정근씨에 관하여

YISUP 2015. 1. 29. 10:05

http://okin.cc/

옥인콜렉티브

 

http://indienbob.tistory.com/816

 

[리뷰] 데카당의 지금, 여기 - <서울 데카당스-Live>

 

데카당의 지금, 여기 - <서울 데카당스-Live>

 

글_성지은

 

데카당스 decadence

1. 쇠퇴타락퇴폐

2. (지나친방종방자함

3. (문학예술상의데카당스 (19세기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퇴폐적 사조경향)

 

1. 2014322일과 23,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 공장 옥상에서는 <서울 데카당스-Live>라는 이름의 공연이 상연되었다. 서울에서 매년 봄마다 열리는 <페스티벌 봄>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이 공연은, 무언가 기묘하다. 옥인 콜렉티브의 2013년 작품인 <서울 데카당스>의 확장판이라고 하는데, ‘데카당스에다가 ‘Live’가 붙는다. 함께 만든 사람들은, 연극 <9일만 햄릿>의 배우와 연출가들, <서울 데카당스>의 주인공(?)이었던 박정근, 인디밴드 쾅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최태현, 그 외 두 명의 퍼포머.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있는, 날 것의 무언가를 보여준다. 라이브 공연의 특성 상 이 이틀이 이 공연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상연의 증인이 되기 위해 322일 공연장을 찾았다.

 


 

2. 1940년대에 세워진 이 공장 건물은 현재 18개 업체 뿐만 아니라 <인디아트홀 공>이라는 문화예술공간이 들어서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문래와 영등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구 가게들, 작은 공장들, 그 사이에 끼어있는 구멍가게들을 지나니 꽤 넓직한 마당을 가진 공장부지가 나타났다. 마당이라고 해 봤자, 그 안에 가득한 것은 폐타이어나 상자들, 철골들이다. 입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구석에서 분진 마스크를 쓰고 스텝 명찰을 목에 건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편평한 판대기에 아슬아슬하게 만든 계단이 2층의 <인디아트홀 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올라가서 티켓팅을 했다. 스텝은 분진 마스크를 건네주었고, 실내에서는 먼지 냄새가 났다. 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스텝이 옥상 공연장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지시하는 대로 분진 마스크를 쓰고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넓은 옥상의 가운데에는 플라스틱 상자를 뒤집어 만든 객석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왼편에는 생산1, 생산2, 자재과라고 쓰여진 낡은 팻말이 붙어 있는 옥탑방 같은 공간이 있었다. 한눈에도 이 옥상이 오랫동안 쓰여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갈 정도의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날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왠지 모르게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는 나이든 공장 노동자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에는 마스크를 안 주었다면서요?” “주긴 줬는데, 돈이 아까우니까. 좋은 것도 아니고 아주 얇은 것으로 일주일에 한 개만 줬어. 매일 손수건을 약품에 적셔서 마스크 안에 넣었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안 할 때가 많았지.” “그래도 건강이 괜찮으셨어요?” “그 때는 젊어서 아무렇지도 않았어.” 곧이어 한켠에 놓인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노이즈가 흘러 나왔다. 공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고층 아파트의 전면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이제는 기능을 멈추어버린 기다란 공장 굴뚝이 높다란 아파트와 경쟁하듯 하늘로 내달리고 있었다. 노이즈는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3. <서울 데카당스-Live>의 중심은 기타회사인 콜트콜텍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연극 <9일만 햄릿>의 배우와 연출가가 연극 연습을 라이브, 그러니까 우리들 앞에서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노이즈가 그치자 연출가 매운콩이 나와서 관객들 앞에 네모난 무대를 그렸다. 그리고 연극에서 햄릿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역을 맡은 이인근씨가 나와 <햄릿>의 한 장면을 무대에서처럼 연기했다. 이어서 연출가가 등장해 배우의 연기를 교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사 한 줄 한 줄을 짚으며 그 대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으로 연기해야 하는 것인지 함께 이야기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연기는 점점 변화했다. 한참을 그렇게 다듬고 최종적으로 연기를 했을 때, 이인근-클라우디우스의 말은 대사에 따라 오르내렸고 시선은 힘이 있었으며 관객들이 마치 햄릿의 한 등장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두 번째는 오필리어 역을 맡은 임재춘씨와 권은영 연출가 팀이었다. 마찬가지로 대사 하나 하나를 짚으며 의미를 살폈다. 임재춘씨가 너무 긴장한 탓인지 계속 딱딱하게 대사를 외우니, 연출가는 배우를 데리고 옥상을 한 바퀴 뛰고는 자연스럽게 숨을 뱉으며 말하는 것을 가르쳤다. 아무래도 오필리어의 감정이 살아나지 못하자, 연출가는 배우가 처한 복직 투쟁이라는 상황을 통해 감정이입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한 가지각색의 생생한 연습을 통해 임재춘-오필리어의 연기도 변화했다.





▲ 옥인콜렉티브, <서울 데카당스-Live>, 퍼포먼스, 2014


변화<서울 데카당스-Live>를 아우르는 주제이다. 이 모든 공연들은 파토스와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완성된퍼포먼스가 아니라,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변화를 날 것으로 보여준다. 이는 이 작품의 모체(?)<서울 데카당스>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2012sns에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게 된 박정근씨는 여러 차례 재판정에 나가야 했다. <서울 데카당스> 역시 박정근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한 전문 연기지도자가 박정근과 마주보고 앉아, 법정에서 읽을 글을 읽어보게 하고 그 어조와 손의 제스처, 호흡을 함께 고친다. 마치 그 글이 연극의 대본이고, 법정이 무대이며, 박정근은 배우인 것만 같다. 한 시간 여의 연기수업이 끝나자, 박정근의 말은 좀 더 설득력 있게 변해 있다. 이 변화를 목격하고, 마침내 인정했을 때, 관객은 재판이 결국 하나의 연극임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관계들은 일종의 연극이며, 따라서 개인의 연기가 실제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옥인 콜렉티브, <서울 데카당스>, 단채널 영상, HD, 2013


<서울 데카당스-Live>는 전작처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간단한 유비 관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관객이 일차적으로 만나는 텍스트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햄릿>이고, 변화를 보이는 것은 <햄릿> 배우들의 연기이다. 1600년에 쓰여진 텍스트와 2014년의 공연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유비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햄릿>이라는 텍스트보다는 그 세부들을 살펴보면, <서울 데카당스-Live>의 기저에 흐르는 교묘한 중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하는 클라우디우스나 미쳐버린 햄릿을 바라보는 오필리어의 마음 말이다. 이 사소한 부분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클라우디우스와 오필리어의 변화가 아닌 다른 존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콜트콜텍 부당 해고 노동자들이 8년간 복직 투쟁을 하면서 겪은 변화이다.

이인근-클라우디우스의 연기연습은 슬픔과 권위를 보여준다. 임재춘-오필리어의 연기연습에서는 아버지의 오랜 투쟁과정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모든 연습이 끝난 후, 원래는 기타 공장 노동자였던 두 명의 배우는 의자에 앉아 연출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오랫동안 투쟁하면서 이렇게 연극도 해 보고 밴드도 하셨잖아요. 어떠셨어요? 뭔가, 변한 것 같으세요?” 이 질문에 대해 내심 엄청나게 달라졌다며 예술의 위대함을 고백하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다지 변화가 없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고, 뭐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복직 투쟁, 연극과 밴드 등의 문화운동, 노동운동, 가족 등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얼굴에 오필리어와 클라우디우스의 모습이 겹쳐졌다. <서울 데카당스-Live>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변화는 결국,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후 복직을 위해 여러 사람들과 노력했지만 결국 돌아갈 일터마저 없어져 버린 이들이 오랫동안 몸으로 겪은 변화가 아닐까. 우리가 미처 관심 갖지 못 했고 사실 상상하지도 못 할 변화. 이렇게 <서울 데카당스-Live><햄릿>, 더 정확히 말하자면 <9일만 햄릿>을 액자로 삼아 그 안에 미세한 변화를 보여줄 장치들을 심어 넣었다. 모든 말들이 끝나고 다시 시끄러운 노이즈-음악이 허공을 가득 메울 때, 이 변화는 얇게 흐르는 물처럼 옥상 바닥에 차올랐다.

 

▲ 옥인콜렉티브, <서울 데카당스-Live>, 퍼포먼스, 2014 (사진_박정근)

 

4. <서울 데카당스-Live>가 보여주는 변화장소성과 맞물려 증폭된다. 이 공장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만큼, 너무나도 강력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 위치는 더욱 더 환상적이었다. 앞과 뒤는 아파트로 둘러 싸여 있었고, 관객들은 그 중 가장 큰 아파트를 마주보고 앉게 되어 있었다. 공연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최태현의 소음-음악은 아파트를 향해 날아가 부딪혀 메아리가 되었다. 두 명의 검은 퍼포머들이 들고 있는 거울이 그 반사를 보여주고 증폭시키는 듯 했다. 공연이 끝날 무렵의 괴성-음악은 공연을 통해 격앙된 감정과 함께, 아파트가 상징하는 자본과 권력의 힘을 향해 소리 지르는 듯 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언짢아진 주민이 나와 항의하기를 기다렸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인디아트홀 공> 내부


자기 자신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한 공간에는 어떤 작품을 가져다 놓아도 그 분위기에 잡아먹혀 마치 소품처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옥인 콜렉티브는 이곳이 예전 공장이었다는 점을 활용하여 <9일만 햄릿>의 맥락과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이곳에 살아있는작품을 집어넣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존재감이 컸고, 매 순간 순간의 분위기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관객의 역량은 작았다. 아마도 힘 센 공간과 흡입력 있는 라이브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형식은 이 작품을 장소특정적(site-specific)’으로, 그리고 참여적(participatory)’으로, 또는 관계 미학적(of relational art)’으로 보이게 만든다. 작품은 매우 매력적이었고 관객으로 하여금 온전히 그 안에 빠져들 수 있게 이끌었지만, 동시에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역할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작품 제작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옥인 콜렉티브는 이미 작가기획자의 중간 어드메에, 그러니까 작가-기획자 또는 기획자-작가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작품의 매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동시대 미술에 있어서 작가는 이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꾸려내는 사람이 된 모습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획자, 즉 큐레이터가 보장해야 하는 것이 작품의 순전한 질보다는 기획력이듯이, 옥인 콜렉티브가 증명해야 하는 것도 기획력일까. 큐레이터의 전시에서 매 회 마다 관심사와 참여 작가와 구체적인 작품의 결이 달라지듯이 <서울 데카당스><서울 데카당스-Live>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 각각의 내용과 형식, 감성도 달라지고, 그렇기 때문에 옥인 콜렉티브에게서 미술작가의 자기 참조성을 발견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일까. 옥인 콜렉티브가 몸담고 있는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변화하는 중이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다양한 사건들을 다룬 옥인 콜렉티브의 작업들에서 계속해서 데카당(décadent)’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당스" - 어떠한 문화나 사조가 정점을 이룬 후 물질적, 정신적으로 쇠퇴하면서 퇴폐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그 무렵의 정서. 아름다우면서도 가난하고 형식적이면서도 타락한 모습. 옥인 콜렉티브가 설명하듯이, 21세기, 아시아,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투명한 사건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시공간을 메우고 있는 정서는 데카당이다. 옥인 콜렉티브가 분명하게 증명하고자 하는 유일한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데카당스지금-여기일 것이다

 

* 사진출처 *

1, 3, 4, 5, 6, 7, 8 _ 옥인 콜렉티브

2, 9 _ 성지은 

옥인 콜렉티브의 신작 <서울 데카당스 – Live>는 2013년에 제작된 <서울 데카당스>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워진 사건들로 가득 찬 서울, 그리고 그 속에 자리잡은 1940년대에 지어진 폐공장에서 실행되는 이번 전시 / 퍼포먼스에서 관객은 스스로의 감각에 의존해서 동선을 발굴할 때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오늘날 데카당스는 명백하게 예술 밖에 있다. 데카당스한 현실에 대적하는 ‘헛기술’로 이루어진 이 공간 / 무대에서 옥인 콜렉티브는 한 청년 철학자의 질문을 생각한다. ‘앞으로의 사람들은 무엇에 희망을 걸고, 어떻게 환멸감을 이겨내면서 나아갈까’
 
<서울 데카당스-Live>는 콜트콜텍 노동자 연극 ‘구일만 햄릿’의 거울 버전이다. 그간 옥인 콜렉티브 작업은 게스트, 친구, 동료, 협력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초대하면서 이루어지곤 했다. 박정근, 임한창의 반즉흥 퍼포먼스를 기록한 <서울 데카당스>에 이어 <서울 데카당스-Live>에서는 ‘구일만 햄릿’의 배우인 이인근, 임재춘 그리고 이 연극의 공동 연출인 진동젤리의 권은영과 매운콩을 캐스팅한다. 햄릿의 귀환을 기다리는 ‘구일만 햄릿’의 주인공들과 폐공장을 무대로 벌이는 장면/해프닝들은 본래의 공연 이전과 이후, 그리고 속내를 드러내며 새롭게 변주된다.
 
 
/장소 안내/
서울특별시 150-863 양평1가 218번지 2층
전화 02-2632-8848
이메일 workbandgong@gmail.com
웹사이트 http://www.gongcraft.net

https://www.facebook.com/workbandGONG

 
연출: 옥인 콜렉티브

각본: 옥인 콜렉티브, 진동젤리

출연: 이인근, 임재춘, 권은영, 매운콩

퍼포머: 이한솔, 임상아

음악감독: 최태현

사진: 박정근

의상협찬: 치명타

 

 

http://blog.naver.com/hotleve/220199930227

 

지난 2014828, 북한 트위터 계정인 우리민족끼리의 트윗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박정근씨에 대해 대법원은 마침내 무죄를 확정하였다. 이는 최초 판결에서 2년 구형을 받은 이후 약 2년 만에 결론지어진 사건이었다. 20121, 박정근씨는 미필적 인식을 갖고 북한 계정을 리트윗했으며 북한 정권에 대한 어떤 의견을 피력하는 트윗을 작성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실 그 어떤 의견이라 함은, “김정일 카섹스”, “김정일을 퇴치하자. 병균퇴치, 암 퇴치”, “위대한 장군님, 쭈쭈바 사주세요와 같이 북한 정권에 대한 희화화의 의도가 강한 트윗들이었으나, 이러한 트윗들과 병치되어 리트윗된 우리민족끼리의 트윗들이 스스로 분명한 이적 행위의 목적을 가지고 북한 체제에 동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재판부는 리트윗은 이적행위이며 농담은 이적표현물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렸던 셈이다. 이 사건에 대한 CNN의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 ”한국에선 농담하면 잡혀 간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유머가 결여되어 있는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리트윗의 의미를 사법부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적행위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누구든지 검열되고 처벌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성되는데, 이는 곧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북한 계정을 리트윗하는 것만으로, ’김정일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몰려 조사를 받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조심스럽게 구분해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쯤되면 사법부가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으로 하나의 키워드에만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왜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인 깔때기를 통과해 검열되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한 주제에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을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외모에 대한 지적이 그렇다. 평소 얼굴이 콤플렉스이던 사람에게 얼굴로 농담을 한다면, 그 사람의 반응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할 것이다. 이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응하여 생각해본다면, 왜 박정근씨의 농담이 농담으로 통하지 못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국가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 채 끌어안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조차 이 콤플렉스를 내재화하게 되는 것일까. 분명 공공장소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을 꺼리고,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춰 말하게 되는 까닭은 분명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박정근씨의 트윗을 읽으며 폭소하는 대신 그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면, 그것은 북한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입력된 글자고, 공명되는 말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말은 말 그 자체로는 어떤 힘도 없다. 말 위에 덧씌워지는 의미들이 그 말에 어떤 힘을 부여한다. ‘공산주의’, ‘북한이라는 말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발화되는 특정한 장소에서의 권력 구조가 말의 의미를 생산하고 왜곡시킨 결과인 것이다. 생산된 그 어떤 의미도 소거될 수는 없고, 단지 도색되거나 확대될 뿐이다. 때문에 말은 결코 중립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어떤 이유로든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 자체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 또한 나는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로서, 그 말이 어떤 경험을 환기시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공산주의라고 발음하는 것에 어떤 두려움을 가진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학습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말을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 만든 특정한 권력 체제가 세대를 걸쳐 우리에게 학습시킨 결과물이다. 마치 국가적으로 통제되고 배양되는 질병처럼, 이 콤플렉스는 우리의 반응을 섬세하게 통제하고 검열한다. ‘김정일 카섹스라는 트윗에 웃음 대신 자연스럽게 이것이 위험한가, 혹은 위험하지 않은가하고 현미경을 들이대는 우스꽝스러운 태도는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는 금지는 단순히 도덕적인 언명이 아니라 명문화된 법률로서 우리를 위협한다. 실체없는 간첩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전시상황인 국가는 끊임없이 반공분자를 색출해 심문하고 전시한다. 마치 적장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것과 같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생생한 이데올로기의 증거로서 간첩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국가의 적이며 나아가 인류의 적이므로, 몰아내야 마땅한 것이다. ‘적이냐, 아니냐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가능한 다른 선택지는 없다. 전쟁 상황은 종결되었지만, 오히려 그 상황 자체가 국가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논리가 되었다. 이러한 전시상황에서,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은 축소되거나 은폐된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이 축소되거나 은폐되기 위해 전시상황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의 콤플렉스, 두려움은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배양되는 것과 같다. <전쟁과 사회>는 이러한 전후 한국 사회의 증상들이 어떻게 한국 전쟁 당시로부터 대물림되어 재생산된 것인지를 역설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한국 전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의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지극히 당연해보이지만, 무겁고도 통렬한 인식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과거사로서 뼈아픈 비극이기도 하고, 동시대 한국에서 반복해서 재연되고 있는 희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게 만들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지는 단순히 개인의 의지로 해결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사건들은, 주로 개인사의 영역에서 고통스러운 체험으로만 남아있을 뿐, 기록되거나 발화되지 못한 것들이다. 학살자가 자랑스럽게 승리를 기록하는 동안,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비극의 고통이 너무나 거대해서였을까. 그래서 그들은 적절히 말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던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이들을 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국가는 이들을 세 번 죽인 셈이다. 한국 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19615.16 쿠데타 후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취급하여 19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고 마치 상종 못할 문둥이 취급한 것이 세 번째이다”. 이처럼 국가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희생자들을 압박하고 매장시켰다. 그 학살의 성격이 국가적이든, 사적인 보복이든 간에 희생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기록조차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충격적일 지경이다.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의 존립에 대단히 위협적이어서 묵살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애도할 시간조차 없이 어떻게 인간적인 국가의 건설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주지시킨 바와 같이, 이러한 비극은 한국에서 다양한 양태로 재연된다. 처음에는 한국전쟁에서, 그리고 4.19 혁명에서, 이후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한결같이 국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며 모든 목소리를 그러한 논리로 흡수했다. 무고한 민중들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학살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국가보안법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민주국가의 이름으로 처단하게 되었다. 국가는 어떤 죽음도 해명하거나 규명하지 않는다. 이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그러한 방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적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국가 스스로가 인정하고 노출한다면, 좌우 대립 진영이라는 유용한 프레임 아래서 방치해두었던 곯아터진 고름들이 속수무책으로 터져버릴 것이다. 어떤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국가에서, 과연 그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국가는 누구를 위한 국가이며, 또한 누구를 위해 유지되고 있는 국가인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국가는 제 출생의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려 한다. 그러나 출생 시 만들어진 체질은 대체로 일생을 지배하기 마련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속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이미 많은 것들을 놓치고 망각해왔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논리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휴전중인 현재, 국가는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가리키지만, 실상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국가 권력에 의한 내재화된 공포이며 두려움이다.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 속에는, 집단적인 폭력의 외상이 자리 잡고 있다. 초라하고 비참한 민족적 비극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성급하게 봉합한 상처는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채 진물을 흘리고 있다.

김정일 카섹스로 대표될 수 있는 박정근씨의 트윗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검열되는 상황에 놓인 것은, 국가권력의 수호를 위해 희생되고 묵살되어야 했던 많은 희생자들의 목소리와는 그 무게가 다른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동일한 문제의식을 남긴다. 왜 어떤 말은 금지되고 처벌받는가? 어떤 말은 해도 되고 어떤 말은 해서는 안되는가? 그것을 정하는 것은 누구이고 어떤 목적으로 금지하는가? 물론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국가적, 민족적 맥락에서 질문되어야 할 것이다. 두려움 없이 어떤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출처] 말할 수 없는 것들 |작성자 리타

 

'자료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sin water  (0) 2015.02.01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0) 2015.01.29
SQUAT_독일빈집점거운동  (0) 2015.01.29
4중주  (0) 2015.01.25
공간의 생산 _ 르페브르  (0) 2015.01.12